전체 글 (116) 썸네일형 리스트형 함께 나누는 아픈 역사-이국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 미쓰비시중공업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5~6월 광주ㆍ전남ㆍ대전ㆍ충남 지역에서 당시 13~15세 어린 소녀 약 300명을 데려갔다. "학교도 보내주고 돌아올 때는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말만 믿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돈도 벌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던 일본땅,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노동과 배고픔이었다.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을 해야 했다.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광주와 전남에서 동원된 6명의 소녀들은 1944년 12월7일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 당시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해방 후 한 푼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돌아온 그들, 근로정신대다.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싸움.. 동토 황무지 일구며 윤동주 가르쳤다...고려인 집단 거주지 '원동마을' '원동(遠東)'. 지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1937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기 전 그들이 살았던 곳이 바로 '원동'이다. 원동은 그들의 고향이다.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내민 듯한 모습인/ 원동 연해주 땅, 뽀시예트에/ 고려인 마을이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가 사셨던/ 농가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겨우 두 세대만/ 이 초원보다 더 가까운 곳이/ 세상에 없는 듯/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가 그리워하는 고향, '원동'이다.1937년 10월 그들이 짐짝처럼 처음 내려졌던 우슈토베 역 인근에도 '원동'이 있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이 만든 '원동마을'이다. 1.. 춤과 노래로 달랜 강제이주...고려인과 웃고 운 '고려극장' 일행을 태운 차가 알마티 시내에서 북쪽으로 30분 가량을 달린다. 시내에서 꽤 먼 거리다. 고즈넉한 동네가 일행을 맞는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건물을 돌아보니 '우리의 흔적'이 곳곳이다. 마치 옛 우리네 시골집을 옮겨놓은 듯한 건물이 일행을 맞는다. 소쿠리, 지게, 각시탈 등등 한적한 시골을 찾은 듯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자리한 '고려극장'이다. 극장 정문 앞에 러시아어로 '서울'이라고 쓴 파란색 버스도 이채롭다. 2004년 알마티를 방문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기증한 것이란 설명이 이어진다. 시내 중심부에서 극장까지 관객을 실어나르는 셔틀버스 역할을 한다. 고려극장 직원은 모두 96명. 이 중 절반이 배우, 가수, 무용수다. 공연은 토요.. 고려인 삶 기록...한반도 밖 최고의 한글신문 '고려일보' 카자스흐탄 경제도시 알마티 시내 동쪽 고리키공원 앞에는 '카레이스키 돔'이라는 건물이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본부가 있는 곳이다. 이곳 2층에는 9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글신문 '고려일보'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일보는 한반도 밖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문이다. 올해로 창간 94주년이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는 특별함이 더하다.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꿋꿋히 지켜내는 등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던 존재가 고려일보다. 김로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장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그는 "신문지상에는 우리 고려인 역사의 기본단계가 반영돼 있다"며 "이 신문은 우리 고려인의 생활을 비춰주는 거울로 서 있을 뿐만 아니.. 용케 살아남은 나를 어루만지다 - 디아스포라 고려인 피로 물들었고, 참으로 값없이 죽어갔다. 80년전 러시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삶이 그랬다. '우리들은 짐승들을 싣는 화물열차에 실려 정든 신한촌을 떠났다. 무슨 죄로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소변을 볼 데도 없고 대변을 볼 데도 없고 세수할 데도 없는 더러운 차 속이었다. 맨바닥에 뒹굴며 한달, 두달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노인과 어린애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어느 곳인지도 알 수 없는 정거장의 철둑길 아래에 파묻었고 부모들은 죽은 자식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뒹굴었다.' 강제 이주 당사자였던 희곡작가 연성용(1909~1995)의 기억이다. '1937년 9월25일 연해주 불리보스똑(블라디보스톡)시에서 32개의 마소를 운반하는.. 디아스포라 고려인-고나의 시작 '우슈토베'를 가다 눈이 내린다. 길은 보이지 않고, 하늘과 땅이 맞닿은 광야가 끝없다. 가끔씩 등장하는 도로 이정표만이 향하는 목적지를 알려줄 뿐이다. 그마저도 낯선 나라의 언어다. 내리는 눈이 막막함과 힘겨움을 더한다. 80년 전 연해주에서 이유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갔던 고려인들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북동쪽으로 330㎞가량 떨어진 우슈토베를 찾아가는 길, 발걸음이 무겁다.기억은 어느덧 80년 전 '그날'이다. 1937년 8월21일. 비극의 시작이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인 이주를 지시하는 비밀명령서에 서명하면서다. 당시 극동의 소련 영내에 거주하는 한인 17만여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쫓아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 정보원이 침투하는 것을 차..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 “돌아올 때는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 일본인 교장의 말이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나도 가요. 나도 가요.” 서로 가겠다고 나섰다. 그때 나이 13살. 가난하고 없던 시절, 배고픔을 달래고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말은 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여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매력이었다. 자신이 선택된 것이 꿈만 같았다. 혹여 부모가 알면 못 가게 할까 봐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야 가르쳐 줬다.양금덕(81) 할머니는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다. 1944년 5월 어느 봄날이었다.“‘(일본으로)가고 싶은 사람 손들라’라 하니까 ‘나도 가요 나도가요’하면서 반 전체가 다 손을 들었지요. 그러자 교장이 다시 담임선생.. 다카하시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회장 “김혜옥 상,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김혜옥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비가 내리던 지난 12일 국립 5·18민주묘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근로정신대 출신의 김혜옥 할머니 묘 앞에 선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 다카하시 마코토(66) 회장이다. 살아생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떠난 할머니에게 그저 죄스러운 마음 뿐이다. 그는 내리는 비를 ‘김혜옥 씨의 눈물’이라며 자신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반드시 당신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겠노라’고.다카하시 마코토 회장. 어찌 보면 그는 참 ‘바보’같은 사람이다. ‘조센징이냐’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그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을 풀고자 백방으로 뛰고 있다. 자그마치 20여 .. 이전 1 ··· 11 12 13 14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