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행을 태운 차가 알마티 시내에서 북쪽으로 30분 가량을 달린다. 시내에서 꽤 먼 거리다. 고즈넉한 동네가 일행을 맞는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건물을 돌아보니 '우리의 흔적'이 곳곳이다. 마치 옛 우리네 시골집을 옮겨놓은 듯한 건물이 일행을 맞는다. 소쿠리, 지게, 각시탈 등등 한적한 시골을 찾은 듯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역만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자리한 '고려극장'이다. 극장 정문 앞에 러시아어로 '서울'이라고 쓴 파란색 버스도 이채롭다. 2004년 알마티를 방문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기증한 것이란 설명이 이어진다. 시내 중심부에서 극장까지 관객을 실어나르는 셔틀버스 역할을 한다. 고려극장 직원은 모두 96명. 이 중 절반이 배우, 가수, 무용수다. 공연은 토요일마다 열린다. 연극이나 가무단, 사물놀이와 발레 공연이 번갈아 이어진다. 고국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고려극장은 우리 민족문화의 근원지 역할을 해왔다. '강제이주'라는 슬픈 역사를 갖는 고려인에게 고려극장의 의미는 더욱 크다. 고려극장은 고려인 생활의 중심에서 그들과 삶을 같이 해왔다. 고려극장 단원들이 우리말로 선보이는 '춘향전'과 '심청전'을 보며 고향을 생각했고, 그들의 육자배기 한 가락에 울고 웃으며 부모형제를 떠올렸다.
역사는 19세기 후반 격동의 구한말로 올라간다. 조선땅을 떠난 사람들이 러시아 극동 연해주 일대에 새 터전을 마련했을 때다. 이들은 극예술의 전통은 물론 조국의 전통문화를 유지ㆍ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전통문화는 각종 민속놀이나 마당놀이로 표현됐다. 이 시기 예술단체들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예술단체가 생겨났다. 훗날 고려극장 창립의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톡 한 담배공장 내에 조직된 예술단이 고려극장의 시초다. 1932년 9월9일. 고려인 드라마 예술단을 중심으로 고려극장이 생겼다.
이른바 '원동 고려극장'이다. 옛 소련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유일한 민족극장의 탄생이다. 고려극장은 신파극을 배격하고 사실주의에 입각한 연극을 추구한 유랑극단이다. 원동에서의 고려극장 역사는 1937년 8월21일자 소련인민위원회 결정서에 의해 그 해 9월 끝이 났다. '원동지역에서 일본인 간첩행위를 막기 위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시킨다는 결정서였다. 단원들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흩어졌다. 당시 소련 비밀문서의 기록이다. '원동의 고려극장은 기본 관객 수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돼 1937년 소련 정부의 결정에 의해 폐관됐다. 또 주요 극장 직원들이 크즐오르다로, 일부는 타쉬켄트로 이주해 크즐오르다와 타쉬켄트에 독자적인 주립 희극극장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흩어진 단원들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다시 극단을 만들었다. 고려극장 역사 제2기의 시작이다. 유랑극단의 진가가 드러난 시기이기도 하다. 단원들은 한인들 집단농장(꼴호즈)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춤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실향의 설움을 달래줬다. 순회공연팀 '꼴호즈-씁호스 고려극장 순회공연'이다. 초기 공연은 '춘향전'이었고, 이주 한인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1940년 고려극장은 제3급 크즐오르다주 고려 희극극장으로 바뀌었다. 원동시절 고려극장 단원들 일부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로 이주해 타쉬켄트주 고려극장을 만들기도 했다.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은 1942년까지 이어졌다. 강제이주라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고려극장은 민족 문화 보존의 근원지였다. 고려일보의 전신인 '레닌기치'에 크즐오르다시 고려인 노동자들이 연극표를 사기 위해 며칠째 극장을 찾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다. 극장 관계자들이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표를 팔고 있어서 표를 구할 수가 없으니 적절한 대책을 세워달라는 내용이었다. 고려극장이 고려인들에게 끼쳤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극장은 1942년 우슈토베로 옮겨졌다. '관객 수를 보장하고 정상적인 노동조건 개선'이 이유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명목에 불과했다. 고려극장의 급은 3급에서 더 오르지 못했다. 인원수는 배우 24명과 음악가는 5명으로 한정됐다. 매년 6~8개월 동안 계속 순회공연을 해야 했고, 극장 자체는 조그마한 지역 소재지에 배치됐다. 우슈토베 고려극장은 지역 클럽 건물에 자리잡았다. 극장 배우들과 꼴호즈의 노동자들, 지역 주민들의 힘으로 극장 건물이 지어졌다. 배우들은 차가운 무대에서 공연을 해야 했고, 관객들은 두꺼운 겨울 부츠와 외투를 입은 채 연극을 관람했다. 그럼에도 극장은 살아 남았고, 공연은 계속됐다.
1959년 5월30일 극장은 다시 우슈토베에서 크즐오르다시로 옮겼다. 작은 시골에서 도시로의 이전이다. 고려극장의 업적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이해 고려극장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카자흐공화국 문화예술 주간에 참가하기도 했다. 크즐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다시 크즐오르다로 극장의 본거지는 옮겨다녔지만 고난 속에서 발전의 싹을 키워나갔다. 1968년 고려극장 역사는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극장은 크즐오르다시에서 알마티 수도로 자리를 옮겼다. 1월8일자 카자흐공화국 내각 결정에 의해 음악드라마 극장이었던 고려극장은 음악 희곡 극장으로 개명됐다. 장르가 바뀐 것이다.
고려극장은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와해와 독립국가의 탄생이라는 격변기와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그럼에도 극장은 명맥을 유지했다. 2002년 고려극장은 드디어 숙원을 이뤘다. 낡은 영화관 건물을 고쳐 독립 건물과 무대를 갖게 된 것이다. 개관식에 참석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면서 고려인은 역사의 먼지가 되지 않았고 동화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카자흐스탄의 사회, 경제 및 정신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치하했다. 이 말은 130여개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이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된 이유가 돼기도 했다.
고려극장에는 지난해 또 한번의 영광이 찾아왔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국립 고려극장에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연중 공연횟수, 배우들의 수상이력 등 22가지의 조건을 충족한 극장에만 부여된다. 고려극장의 이류보피 극장장은 "그동안의 고려극장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라며 "그만큼 고려인 문화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사실 고려극장의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고려극장은 머나먼 30년대에 발생해 오늘날까지 영광스러운 길을 밟아 왔다. 극장의 전문적인 능력과 지식이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해 왔다'. 카자흐스탄 민족연합 기관지인 '도스틱-드루즈바'의 기록이다. 고려극장 배우였던 최따찌야나 세르게예브나(68)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하게 된 고려극장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족 유산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이며 자랑할 만한 전문적인 문화발원지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최석 시인은 "고려극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역사 속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고려일보'가 이주 한인들의 길잡이가 됐다면, '고려극장'은 그들의 여정에 의복이자 맛있는 음식이고, 따뜻한 집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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