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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 좋은 이야기

용케 살아남은 나를 어루만지다 - 디아스포라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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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들었고, 참으로 값없이 죽어갔다. 80년전 러시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삶이 그랬다. '우리들은 짐승들을 싣는 화물열차에 실려 정든 신한촌을 떠났다. 무슨 죄로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소변을 볼 데도 없고 대변을 볼 데도 없고 세수할 데도 없는 더러운 차 속이었다. 맨바닥에 뒹굴며 한달, 두달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노인과 어린애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어느 곳인지도 알 수 없는 정거장의 철둑길 아래에 파묻었고 부모들은 죽은 자식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뒹굴었다.' 강제 이주 당사자였던 희곡작가 연성용(1909~1995)의 기억이다. '1937년 9월25일 연해주 불리보스똑(블라디보스톡)시에서 32개의 마소를 운반하는 화물 차량들로 된 첫 이주열차가 떠났다. 나는 지금도 우리를 전송하는 친지, 친척, 친우들의 울음 통곡 저주의 목소리를 듣는 듯싶다. 너무나 비참했다.' 문학평론가 정상진(1918~2013)이 기록한 '잔혹한' 강제이주다. 그 역시 강제이주 당사자다. 그에게는 '세계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잔혹하고, 비참하고 야만적인 이주'였다.

어느덧 흘러버린 80년의 세월, 그들은 이제 없다. 처음 짐짝처럼 부려졌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도 흔적이 사라져간다.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땅굴 막 자취는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한 채 흔적이 지워져 간다. 함께 고난을 견뎌냈던 이들도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우슈토베에서 만난 지순옥(95) 할머니. 최고령의 몇 안 되는 강제이주 당사자다. 1937년 할머니는 수업 중이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어머니와 함께 화물열차에 탔다. 이유도 몰랐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올라탄 화물열차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마소를 운반하던 열차, 마실 물도 없어서 빗물과 도랑물을 먹었다. 대ㆍ소변도 그릇에다 해결해야 하는 비참한 나날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추위와 배고픔 때문이었다. 죽은 이들은 화물칸 한쪽에다 모아놓았다가 기차가 강을 지날 때 물에 던졌다. 홍역에 걸린 이는 다른 이에게 옮을까 봐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목에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져넣기도 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할머니의 눈이 어느새 불거진다. 한달 가량을 달려 내린 곳, 그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허허벌판에서 살기 위해 수저로 땅굴을 팠다. 갈대를 베어서 땅에 깔고 덮을 갈대도 없어 그냥 자기도 했다. 또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이 얼어 죽었다. 할머니가 내린 곳은 소금기가 있는 모래땅인 탓에 50㎞가 넘는 곳에서 갈대를 베어와야 했다. 벌판이라 나무도 없었다. 쇠똥으로 불을 때기도 했다. 기억은 또렷하다. 그러나 몸은 예전 같지 않다. 곱던 할머니의 손은 어느덧 주름투성이로 변했다. 할머니의 머리맡에 놓인 젊을 적 사진은 아련한 기억의 흔적이다. 귀는 잘 들리지 않고,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말도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남한에서 왔다'는 말에 할머니는 두 손을 꼭 쥐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다 말 못하오, 그 고생…." 어렵게 말을 잇던 할머니의 눈이 다시 불거진다.
이수라(93) 할머니는 13살 때였다. 할머니는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지"라고 한다. "고생스레 살았어. 좋게 산 적이 없어, 모진 속이 타오. 사는 게 이렇소, 좋은 일이 없소. 집도 없었고…" 아픈 기억들이 이어진다. 할머니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6형제 자매와 함께 화물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에 버려졌다. 살아남기 위해 일해야했고, 17살때 시집을 가야했다. "그 역사를 말하자면 어디다 하겠어…." 남편은 할머니가 서른살 때 세상을 떠났다. 한살, 두살, 다섯살, 열두살의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는 세상에 남겨졌다. 다시 살아야 했다. 억척스럽게 할머니는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다. "고상(고생)한 것 말 할 것도 없이 고상했지. 고상했는데 어찌 이리 오래 사오. 이렇게 오래살 줄 몰랐다오…." 그래도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할머니다. "할메(할머니) 찬양(그들은 노래를 그렇게 불렀다) 한번 해보오 ." "무슨 찬양, 내 나이 설쇠면 아흔 섯이요." 한참을 주저하다 할머니의 입에서 '아리랑'이 흘러나온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오~." 이역만리에서 할머니가 고향을 그리며 잊지 않고 불렀던 아리랑이고, 지금껏 들었던 가장 숙연한 아리랑이다.
조봉선(90)할머니는 10살이었다. 아직은 어렸을 나이, 그래도 기억이 생생하다. "힘들었고, 무서웠다"는 말부터다. 사람이 죽고, 강물에 빠뜨리는 것을 보며 카자흐스탄에 왔다는 할머니다. 마소를 싣고 다니는 기차에서의 기억이다. 할머니는 12살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고 했다. "먹을 게 없지, 일하지 않으면. 감자를 삶아 먹었고, 감자를 삶아 먹은 곳에 물을 부어 또 먹었어." 무거운 것을 혼자 들기에는 어린 나이, 둘이 힘을 합해 짐을 옮겼다. 팔이 떨렸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할머니. 그러다 다친 곳도 셀 수 없다. 할머니가 다리에 난 상처를 보여준다. 상처의 흔적은 80년의 세월에도 그대로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프다는 할머니다. 왜 고향을 두고 떠나와야 했는지, 왜 그리 살기 위해 고생을 해야했는지, 할머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선다. "먹지도 못했는데 이리 오래 사는지 모르겠어. 자꾸 마마 파파(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렇게 부른다)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오 지금도…." 이젠 말라버린 눈물이다. 할머니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80년전 원동을 떠나던 그들처럼 무겁고, 무겁다.
'어느날 스탈린은/극동 연해주/붙박이 고려인들을/완행열차 화차에 실어/강제 이주를 시켜버렸다/달리는 차 안에서/송장을 던져버렸다/열흘도/보름도 달리는 차 안에서/죽은 송장 아바이를 던져버려야 했다/그렇게 가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려졌다/(중략)/여기서 살아라/여기서 살든지 죽든지 하라/하고/빈 열차는 돌아가 버렸다/ 그 시작도 끝도 없는 곳 알마타에서 울다가/웃다가/움을 짓고/밭을 만들고/논을 만들고/나라 없는 고려인들의 삶과 죽음을 만들어냈다'. 고은 시인이 그린 고려인의 아픈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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