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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좋은 이야기

다카하시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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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옥 상,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김혜옥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가 내리던 지난 12일 국립 5·18민주묘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근로정신대 출신의 김혜옥 할머니 묘 앞에 선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 다카하시 마코토(66) 회장이다. 살아생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떠난 할머니에게 그저 죄스러운 마음 뿐이다. 그는 내리는 비를 ‘김혜옥 씨의 눈물’이라며 자신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반드시 당신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겠노라’고.
다카하시 마코토 회장. 어찌 보면 그는 참 ‘바보’같은 사람이다. ‘조센징이냐’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그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을 풀고자 백방으로 뛰고 있다. 자그마치 20여 년의 세월이다. 때론 ‘일본 정부에 압박을 넣어달라’며 한국 정부를 설득하고자, 때론 피해자 가족을 찾고자 한국에 다녀간 것만도 50여 차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매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도쿄행 신간선 열차에 오른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거리는 360여 ㎞.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360㎞ 달려 도쿄 한복판 시나가와 역과 미쯔비시 본사 앞에서 금요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7월 7월 시작된 금요시위는 벌써 2년을 훌쩍 넘겼다. 지난 8월21일로 ‘100회 금요행동’을 맞았고, 오는 18일로 104회째를 맞는다.
셈법이 빠른 사람이면 고개를 돌려도 몇 번을 돌렸을 시간이다. 지난해 11월11일 일본 최고재판소마저 1965년 합일협정을 이유로 사건을 ‘기각’해 더는 사법적 구제의 길마저 사라진 마당인데, 그를 비롯한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아직껏 발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답은 뜻밖에 간단명료했다. “대단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라 했다. “가해국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이 마땅한 데 그렇지 못하는 일본 정부와 미쯔비시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인정하지 않는 일본 용서할 수 없다”
그가 처음 조선근로정신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1986년이었다. 당시 그는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역사교사였다.
“나고야는 2차 대전 당시 비행기와 전투기를 만드는 군수공장이 있던 곳이었다. 미군의 폭탄이 도쿄보다 나고야에 더 많이 투하됐다. 미군의 공습 피해를 조사하다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이고 식민지 지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해사실만 아니라 가해사실도 조사해보기로 했다. 나고야에도 필시 조선 사람들이 강제연행돼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미쯔비시 중공업을 조사하는데 (미쯔비시)회사 과장이 조선근로정신대에 관련된 자료를 내 줬다. 그 자료를 보고 1944년 12월 발생한 동남해 지진에서 6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지진 사망자의 추모기념비를 만들기 위해 유족들을 찾아 제주도와 광주, 나주, 목포 등 남도 전체를 돌았다.”
1988년 12월 공장 한쪽에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다. 그때 피해 할머니와 유족들을 초청해 함께 불귀의 객이 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43년 만에 처음으로 공장을 방문한 피해 할머니들도 울고, 유족도 울고, 그도 울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유족들과 피해 할머니들이 나서기를 꺼려했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근로정신대라는 사실을 근 40년 이상 숨기고 살았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소송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를 상대로 재판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유족들이 만류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교사였다. 내 제자, 내 딸이 끌려갔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외면하게 되면 아이들에게 평화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1997년부터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원고를 모았다. 1998년에는 변호사들과 함께 소송지원 준비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99년 3월1일 미쯔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본의 양심적인 변호사 40여 명이 공동변호단으로 참여했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였다. 일본 내 전범기업 미쯔비시의 사죄를 촉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미쯔비시를 상대로 한 재판을 시작했다. 지원회는 재판비용과 피해 할머니들의 체류비 등 모든 비용을 지원했다. 또 재판 진행 상황을 담은 지원회 소식지를 발행하고, 연극 ‘봉선화’를 나고야 시내 한복판에 올렸다. 그리고 ‘그 소녀들을 잊을 수 없다’라는 제목의 연주회를 여는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했다. 하지만 재판결과는 참담했다. 나고야 재판소와 고등재판소 기각 판정에 이어 도쿄 최고재판소에서도 최종 기각 판정을 했다. 8명이던 원고도 6명으로 줄었다. 10년에 이른 재판 동안 두 분의 피해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기만 한 그다. 그의 검은 머리도 어느새 백발이 됐다.
그렇다고 마냥 진 싸움만은 아니었다. 나고야 고등재판소는 “미쯔비시가 할머니들의 청춘을 앗아갔다”며 강제연행과 불법노동 사실을 인정했다. 그 판결이 미쯔비시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데 큰 힘이 됐고, 미쯔비시를 협상 테이블로 이끄는 큰 힘이 됐다. 비록 아직껏 미쯔비시는 ‘재판 결과에 따를 뿐’이라며 협상에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사회보험청이 ‘후생연금 납입증명서’를 통해 피해 할머니들의 강제노역을 사실상 인정했다. 법원에 이어 정부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54년만의 정권 교체도 희망적이다.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전후처리 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수였던 지원회도 지금은 1100여 명이 함께하고 있다.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큰 강을 이루듯, 11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를 이해를 해주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미쯔비시 중공업의 태도가 변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얼마 전 또 다른 큰 힘을 얻었다. 바로 문제해결을 바라는 광주시민의 요구였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3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미쯔비시 중공업 측에 전달한 것은 큰 힘이었다. 이 같은 ‘시민모임과의 교류’를 그는 “최고의 자산”이라고 했다.
“광주에서 시민모임이 생긴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서명운동 등 시민모임의 열성은 미쯔비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런 시민모임의 열정과 (더 많은 서명을 받아)광주시민의 뜻을 (새로 당선된 민주당)국회의원에게 전달해, 그들이 미쯔비시에 압박을 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시민모임이 직접 미쯔비시와 협상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그는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는 내년 6월을 목표로 잡았다. 일본 내 시민들의 관심과 광주 시민들의 뜻이 한 데 모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그는 굳게 믿고 있다. “내 가슴에는 ‘희망’이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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