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스흐탄 경제도시 알마티 시내 동쪽 고리키공원 앞에는 '카레이스키 돔'이라는 건물이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본부가 있는 곳이다. 이곳 2층에는 9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글신문 '고려일보'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일보는 한반도 밖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문이다. 올해로 창간 94주년이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는 특별함이 더하다.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꿋꿋히 지켜내는 등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던 존재가 고려일보다.
김로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장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그는 "신문지상에는 우리 고려인 역사의 기본단계가 반영돼 있다"며 "이 신문은 우리 고려인의 생활을 비춰주는 거울로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앞길을 인도해주는 등대, 우리 문화의 정신적 가치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우리의 정신적 축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고려일보'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신문은 우리에게 단순한 정보의 원천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과 독창성의 구현으로, 고려사람들의 독특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고려일보 없는 고려인 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찾아간 고려일보. 93년의 역사에 걸맞지 않는 '외형'이다. 20평이 채 못되는 공간, 기자를 포함해 직원이 고작 5명 뿐이다. 우리의 편집국 한 부서보다 작은 규모에 새삼 놀란다.
고려일보의 역사는 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고려일보는 1923년 연해주에서 창간된 '선봉'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이곳에선 6개의 잡지와 7개의 신문이 한글로 발간됐다. '선봉', '문화', '새세계', '로동자', '로동신보', '적성', '동아 공산신문' 등이다. '선봉'은 가장 대중적인 신문이었다. 1923년 3월1일 '3ㆍ1독립만세운동' 4주년을 기념해 창간호가 발간됐다. '선봉'은 처음에 쁘리모리예(연해주의 러시아어) 공산당위원회 및 쁘리모리예 직업동맹협의회의 기관지였다. 나중에 전 소련연방 공산당 기관지가 됐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한때 하바롭스크로 옮겨 발행되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했다. '선봉' 신문은 1923년 34회 발행됐고, 1924년에는 주 2회, 1930년부터 1931년까지는 주 3회, 1932년부터 1935년에는 격일로 발행되기도 했다. 발행부수도 1928년 2000부, 1929년 3600부, 1930년 6900부, 1931년에는 1만부가 넘었다. 신문 외에도 쁘리모리예에는 250여개의 고려인 학교와 1개의 사범대가 설립돼 운영됐다. 또 수많은 자생적 예술단체들이 활동했는데 이 단체들은 나중에 설립된 고려극장으로 통합됐다.
이렇듯 강제이주 이전까지 원동 고려인의 문화활동과 사회활동은 풍부하고 다양했다. 그러나 '선봉' 신문은 1937년 9월12일 1644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1937년 소련 정부가 17만여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면서 철퇴를 맞았다. 가장 슬픈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고, 소련 고려인 출판의 역사에서도 가장 힘든 시기의 시작이었다. 강제 이주 전날 밤 신문사 전 직원은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들에 의해 체포됐다. 다행히 몇몇 신문사 직원들이 한글 활자를 챙겨온 덕분에 1938년 '레닌기치'라는 이름으로 신문을 다시 낼 수 있었다.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모국어 신문사에 커다란 힘을 쏟았던 최봉남, 지가이 알렉산드라, 조 발렌찌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일개구역의 한글신문인 '레닌기치'의 초라한 발행부수는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우즈베키스탄까지 광범위하게 이주한 모든 고려인들에게는 현저히 적었다. 더구나 신문은 2개면밖에 되지 않은 축소된 형태였다. 신문사의 길고도 집요한 요구와 청원이 이어졌다. 1940년 씌르다리야 구역신문 '레닌기치'를 크즐오르다 주 신문으로 재편했다. 발행부수 6000부에 주 5회 발행이었다. 신문사 직원도 12명으로 늘었다. 1953년 카자흐스탄 공산당중앙위원회 사무국은 한글로 발행되는 '레닌기치' 신문을 주립에서 국립으로 재편했다. 1954년 공화국신문으로 카자흐스탄 공산당 크즐오르다주 및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 재편했다. 발행부수 7000부, 주 5회 발행, 면수도 4개면으로 늘렸다. 1961년에 '레닌기치'는 공화국간 공동신문이 됐다.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중앙아시아공화국들에 보급됐다. 신문사 정원도 60명으로 늘었다. 초기 '레닌기치'는 발행부수가 명목상으로 6만부였다. 그러나 실제 발행부수는 초기에 2000부, 나중에 4000부가 됐고 주 3회 발행됐다. 발행면도 2면으로 축소됐다. 1980년대 말 개방의 바람이 불었다.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고, 고려일보에게는 또다른 시련의 시작었다.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레닌기치'는 공화국간 공동신문에서 소련 붕괴와 함께 자동적으로 카자흐스탄 국내 신문이 됐다.
이름도 1991년 '고려일보'로 바꿨다. 일간으로 한글판을 발행하면서 러시아어 작가와 기자들이 근간이 돼 러시아어로 '고려' 주간을 펴내기도 했다. '고려' 주간 발행은 재소련인 역사의 '백서'를 보충해주는 기사들이 첫 러시아어 주간지에 실린 일대 사건이었다. 이때는 신문 한 면이 러시아어였다. 이 같은 형식은 1989년 시작됐다. 그 때 '레닌기치'는 주 5회 발행에 A2크기로서 '프라우다' 신문과 같은 규격이었다. '고려' 주간은 겨우 100호를 조금 넘기고 폐간했다. 국내 상황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경제적 문제가 첨예하게 부각되면서 고려일보도 다시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와 개인적 지원들에 힘입어 신문사는 1990년대 냉혹한 시기를 견뎌냈다.
현재의 고려일보는 여전히 어렵다. 젊은 세대가 한글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가 줄다 보니 전체 20면 가운데 4개면을 한글로 제작하고, 16면은 러시아어로 제작한다. 초창기 고려일보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발행부수도 2000부 정도다. 고려일보 남경자 주필은 "한글로 기사를 쓸 수 있는 분들이 사라지고 있다. 러시아어로 글을 써주면 다시 한글로 번역해 신문에 실어야 할 정도"라고 했다. 그는 "고려일보는 한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고려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기사를 쓸 기자도 이를 읽을 줄 아는 독자도 없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40년이 넘도록 고려일보를 지켜고 있는 '산 증인'이다. 현재 고려일보의 한글판은 남 주필 혼자 도맡고 있다. 그가 있기에 한글로 발행되는 고려일보가 남아 있는 셈이다. 총주필인 김콘스탄틴도 그 점이 우려스럽다. 그는 "남 주필님이 힘닿는 데까지 근무하겠다지만 뒤를 이을 후배가 없어 큰일이다. 고려인 후손이나 한국에서 뜻있는 젊은이가 지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90년 넘게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고려일보, 그 꿋꿋함에 고개 숙여진다. 그러나 김콘스탄틴 주필의 걱정이 귓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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