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8) 썸네일형 리스트형 치욕,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일제 침략의 흔적들 일제의 야욕이 빚은 '태평양전쟁'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줬다.죄 없는 백성은 군인이나 노무자, 위안부로 끌려가야 했다. 조국의 산하 역시 일제의 침략기지가 되어야 했다. 문전옥답은 일본군 부대의 막사로 내주어야 했다. 국토는 일본의 총알받이로 만들기 위한 방공호, 격납고와 고사포 진지, 비행장 등으로 파헤쳐졌다.광주ㆍ전남 곳곳에도 일제의 흔적이 남았다. 목포 고하도 특공기지, 여수 항공기지, 신안 옥도 주정기지, 추자도 수상특공기지, 무안 망운 비행장, 가사도 방어진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자료에 따르면 광주ㆍ전남에만 400여 곳이 넘는다. 한반도 전체로는 8000여 곳이다.그러나 현장의 수많은 '군사유적'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훼손되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조만간 우리의 기억에서 잊.. 지워진 침략의 역사-나가사키 원폭자료관 1945년 8월9일 오전 11시 2분.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일명 '패트 맨(fat man)'이다. 원자폭탄 모양이 뚱뚱해서 그렇게 불렸다. 패트 맨은 나가사키시 439m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원만 140m이며 불덩어리 표면온도가 9000도, 지상의 투하 중심지도 4000도에 달했다. 도시는 한순간에 폐허가 됐고,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11시 2분을 가리킨 채 멈춰 버린 시계만이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다.원폭이 떨어졌던 곳 인근에는 지금 평화공원이 조성돼 있다.비둘기 날개를 형상화한 '평화의 샘(분수)'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생존자들 증언에 따르면 피폭자들은 한결같이 '물을…물을…' 외치며 죽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숨진 영혼들의 목을 축이기 위해 분수를 설치했다.광장 한.. 가미카제 기념관 '지란특공평화회관' 가미카제(神風ㆍ신의 바람).그들에게는 '평화의 상징'이다. 그들은 '평화를 위한 전쟁'에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자신을 잊어달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행복하게 먼저 떠난다'는 그들이다.'지란특공평화회관'은 그들을 기리기 위한 장소다. 지란은 태평양전쟁 당시 특공기지가 있던 도시다. 그들은 지란을 철저하게 '평화'로 덧칠했다.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조작된 애국심' 가미카제는 이곳에서 '순국열사'로 감사의 대상이다. 가미카제의 '강요된 웃음' 또한 애국심으로 포장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화가 있다'는 믿음을 강요한다.세계문화유산 기록으로 남기려고도 했다. 특공대원들의 평화 메시지를 널리 알려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 일본의 우경화의 또다른 시작 '쇼인신사'의 '쇼카손주쿠' "조선을 정벌해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유수록(幽囚錄)이다.이른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시작이다. 그의 '꿈'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제자'들에 의해 구현됐다. 쇼카손주쿠는 쇼인이 2년여 동안 제자를 가르쳤던 시골의 작은 학숙이다.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도쿠가와막부를 쓰러뜨리고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가 되어 강병 정책을 추진했다. 무사 계급과 다이묘(大名)까지 제거한 다음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는 국민개병의 근대 군대를 만들었고, 그 군대로 침략을 시작했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앞장섰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탄생한 일본 제국주의의 초대 총리다. 그는 조선 침략을 주도했고,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을.. 일본 우경화의 현장 '유신 후루사토관' 둘러보니 후루사토(ふるさと)'는 '고향'을 의미하는 일본어다.1994년 개관한 '유신후루사토관'. 말 그대로 '메이지유신의 고향, 사쓰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시관'이다. 가고시마(鹿兒島) 시내 한복판에 있다. 가고시마 중앙역 '젊은 사쓰마의 군상'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다.'고향'이란 표현에서 사쓰마(薩摩ㆍ현 가고시마)의 자부심이 읽힌다. 사쓰마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역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유신후루사토관은 사쓰마 출신의 메이지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기념관이 있는 바로 동쪽 소공원이 사이고가 태어난 곳이고, 서쪽 소공원이 오쿠보가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우리에게는 불편한 역사다.사이고와 오쿠보는 시기를.. 메이지유신의 고향 '가고시마 ' 일본 근대화 역사에서 사쓰마(薩摩ㆍ지금의 가고시마)는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일본을 알려면 메이지 유신을 이해해야 하고, 메이지 유신을 알기 위해서는 가고시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역사학자 주강현의 이야기다. 가고시마(鹿兒島)는 우리나라로 치면 해남 땅끝 정도다. 당시 정치 중심이었던 에도(도쿄)에서 수천㎞ 떨어진 변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중국과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가깝다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일찍이 무역이 발달했고, 일본 근대화의 발상지가 됐다. 앙숙이었던 조슈 번(長州藩ㆍ 지금의 야마구치 현)과 손을 잡고 메이지 유신도 성공하게 했다. 그 결과 700년 동안 칼을 차고 활보했던 사무라이(막부)정권이 막을 내렸다.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었고, 군국주의 서막을 열었다.우리와는 불편한 관계.. 일본 우경화의 시작 '쇼인신사'를 가다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ㆍ1830~1859)은 일본 우경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정한론(征韓論)을 가다듬고,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창시했다. 그의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로 성장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쇼인의 제자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보면서 요시다 쇼인을 주목하는 이유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여정은 힘들었다. 목적지는 야마구치현의 하기(萩), 쇼인신사가 있는 곳이다. 혼슈(本州) 최남단, 시모노세키(下關)로부터 100㎞ 떨어진 곳이다. 때론 대로를, 때론 산길을 버스로 2시간 넘게 달려야 했다. 진눈깨비도 여정에 힘듦을 보탰다.하기시, 야마구치 역사의 심장이다. 19세기 까지 조슈 번(長州藩ㆍ지금의 야마구치)의 영주가 살았고, 번.. 동토 황무지 일구며 윤동주 가르쳤다...고려인 집단 거주지 '원동마을' '원동(遠東)'. 지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1937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기 전 그들이 살았던 곳이 바로 '원동'이다. 원동은 그들의 고향이다.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내민 듯한 모습인/ 원동 연해주 땅, 뽀시예트에/ 고려인 마을이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가 사셨던/ 농가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겨우 두 세대만/ 이 초원보다 더 가까운 곳이/ 세상에 없는 듯/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가 그리워하는 고향, '원동'이다.1937년 10월 그들이 짐짝처럼 처음 내려졌던 우슈토베 역 인근에도 '원동'이 있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이 만든 '원동마을'이다. 1..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