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좋은 이야기 (4) 썸네일형 리스트형 함께 나누는 아픈 역사-이국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 미쓰비시중공업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5~6월 광주ㆍ전남ㆍ대전ㆍ충남 지역에서 당시 13~15세 어린 소녀 약 300명을 데려갔다. "학교도 보내주고 돌아올 때는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말만 믿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사."돈도 벌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던 일본땅,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노동과 배고픔이었다.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을 해야 했다.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광주와 전남에서 동원된 6명의 소녀들은 1944년 12월7일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 당시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해방 후 한 푼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돌아온 그들, 근로정신대다.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싸움.. 고려인 삶 기록...한반도 밖 최고의 한글신문 '고려일보' 카자스흐탄 경제도시 알마티 시내 동쪽 고리키공원 앞에는 '카레이스키 돔'이라는 건물이 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본부가 있는 곳이다. 이곳 2층에는 9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글신문 '고려일보'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일보는 한반도 밖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문이다. 올해로 창간 94주년이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에게는 특별함이 더하다.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꿋꿋히 지켜내는 등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던 존재가 고려일보다. 김로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장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그는 "신문지상에는 우리 고려인 역사의 기본단계가 반영돼 있다"며 "이 신문은 우리 고려인의 생활을 비춰주는 거울로 서 있을 뿐만 아니..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도 갈 수 있다.” “돌아올 때는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 일본인 교장의 말이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나도 가요. 나도 가요.” 서로 가겠다고 나섰다. 그때 나이 13살. 가난하고 없던 시절, 배고픔을 달래고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말은 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여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매력이었다. 자신이 선택된 것이 꿈만 같았다. 혹여 부모가 알면 못 가게 할까 봐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야 가르쳐 줬다.양금덕(81) 할머니는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다. 1944년 5월 어느 봄날이었다.“‘(일본으로)가고 싶은 사람 손들라’라 하니까 ‘나도 가요 나도가요’하면서 반 전체가 다 손을 들었지요. 그러자 교장이 다시 담임선생.. 다카하시 나고야 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회장 “김혜옥 상,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김혜옥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비가 내리던 지난 12일 국립 5·18민주묘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근로정신대 출신의 김혜옥 할머니 묘 앞에 선 그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 다카하시 마코토(66) 회장이다. 살아생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떠난 할머니에게 그저 죄스러운 마음 뿐이다. 그는 내리는 비를 ‘김혜옥 씨의 눈물’이라며 자신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했다. ‘반드시 당신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겠노라’고.다카하시 마코토 회장. 어찌 보면 그는 참 ‘바보’같은 사람이다. ‘조센징이냐’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그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을 풀고자 백방으로 뛰고 있다. 자그마치 20여 ..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