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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치욕,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일제 침략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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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야욕이 빚은 '태평양전쟁'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줬다.

죄 없는 백성은 군인이나 노무자, 위안부로 끌려가야 했다. 조국의 산하 역시 일제의 침략기지가 되어야 했다. 문전옥답은 일본군 부대의 막사로 내주어야 했다. 국토는 일본의 총알받이로 만들기 위한 방공호, 격납고와 고사포 진지, 비행장 등으로 파헤쳐졌다.

광주ㆍ전남 곳곳에도 일제의 흔적이 남았다. 목포 고하도 특공기지, 여수 항공기지, 신안 옥도 주정기지, 추자도 수상특공기지, 무안 망운 비행장, 가사도 방어진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자료에 따르면 광주ㆍ전남에만 400여 곳이 넘는다. 한반도 전체로는 8000여 곳이다.

그러나 현장의 수많은 '군사유적'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훼손되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조만간 우리의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를 일이고, 일제강점기의 역사인식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둡고 수치스러운 과거도 분명 우리의 역사이고, 기억해야 할 역사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잊지 말아야 할 명제다.

 

고하도 일제 특공기지 동굴에서 바라본 목포 유달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뒤편 중앙공원 산책로에 있는 대형 동굴 내부와 외부. 무안 현경면 일대에 남아 있는 격납고 시설. 목포 유달산 방공호 내부에 재현한 동굴조성 당시의 노역 모습.(위로부터 시계 방향)

 

첫 걸음은 고하도(高下島)다. 목포항에서 바라다보이는 작은 섬이다. 높은 유달산 아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고하도다.

목포항에서 고하도 선착장까지 1.2km에 불과하다. 지금은 섬이 아니다. 인근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꽤 오래된 시간이다. 목포에서 바라본 섬 북동쪽은 가파른 경사면에 수목이 우거져 있어 마치 무인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섬 남서쪽은 소규모 갑만이 발달했고, 그사이 간척지도 펼쳐져 있다. 마을도 있는 유인도 였다.

고하도는 천혜의 요지다. 서남해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영산강의 빗장 역할을 하는 지리적 특성 탓이다. 역사 무대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이곳에 있다.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수군사령부를 설치한 곳이다. 1597년 10월 29일이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었던 전진기지가 바로 이곳 고하도다. 1598년 2월 16일, 이곳에서 출진할 때까지 전선 40여 척을 건조하고 8000여 명의 군사를 이곳에서 조련했다. 수군 통제영 터는 지금도 남아있다.

고하도는 '침략의 역사'도 남아있다. 제국주의를 꿈꾸던 일본의 흔적이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던 1945년 초 일제는 조선의 민간인을 징병해 고하도 해안 곳곳에 진지 동굴을 파게 했다.

물어물어 그 '흔적'으로 향했다.

마을과 맞닿은 해안가에 그 첫 번째 흔적이 있다. 섬의 북동쪽 말바우 옆 작은 만이다.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다. 단단한 해안 암반을 정과 폭약으로 판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70년 전 이곳에서 일제의 감시하에 정으로 굴을 팠을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얼마 되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동굴이 있다. 역시 작은 입구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다. 경사면이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만조가 되면 동굴 입구까지 물이 찬 흔적도 발견된다. 일제가 목포항으로 접근해 들어오는 적선을 공격하기 위한 '자살특공정'을 숨겨두기 위한 진지 동굴이다. 일제의 특공기지는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해안,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어불도 해안에서도 발견됐다.

조금 다른 형태의 동굴도 있다. 입구는 조그마하지만, 들어가 보니 'Y'자형으로 갈라져 제법 길게 파여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아마도 수상특공부대의 지휘본부와 관련된 듯했다.

이곳 말바우 옆 작은 만 근처에만 동굴이 5개가 모여있다. 그러나 동굴 안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무관심'을 대변하는 쓰레기였다.

고하도 진지 동굴은 모두 20여 곳. 그러나 목포대교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라지고, 현재는 10여 개가 남아 있다. 모두 목포가 바라다 보이는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다.

진지 동굴은 고하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하도와 마주 보이는 목포 유달산 밑 해안가에도 유사한 진지 동굴이 남아있다. 유달산으로 올라가는 지점의 해안로 83번지 옆 공터다. 이곳 동굴도 고하도의 동굴처럼 일자형 동굴이다. 현재는 해안정비를 위한 자재가 동굴을 가려버렸다. 아쉬웠다.

인근에도 비슷한 크기의 관통 굴이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동굴의 절반은 2004년 아리랑고개 도로 개설 공사를 하면서 사라졌고, 현재는 절반만 남아 있는 상태다.

역시 아쉬운 대목이다. 역사의 현장이 무관심 속에 사라지고 있고, 방치된 현장이었다. 인근에서 만난 주민 유모(73)씨는 "도로 공사로 모두 매립될 처지였는데, 시청에 달려가 '역사현장은 보존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민원을 제기해 절반이라도 보존할 수 있었다"며 "이제라도 관리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나마 '유달산 방공호' 사정은 달랐다.

옛 목포일본영사관(현재 목포근대역사관) 뒤편에 있는 동굴이다.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는 85m이며 밖으로 통하는 문은 3개가 있다. 당시 유달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사단의 사령부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현재는 일제의 감시하에 굴을 파고 있는 모습 등이 재현돼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일제의 또 다른 흔적을 찾아 발걸음을 인근 무안 현경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만든 비행기 격납고 시설을 찾기 위해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밭 한가운데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유수정 마을에만 3개가 있다.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만든 격납고들은 70년 세월의 풍상에도 농경지 한가운데 굳세게 버티고 서있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했다. 쓰레기가 가득했고, 일부는 농민들이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등 이곳 역시 방치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지울 이유는 없다. 오히려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방치되고 사라져가는 일제의 흔적이 던지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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