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神風ㆍ신의 바람).
그들에게는 '평화의 상징'이다. 그들은 '평화를 위한 전쟁'에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자신을 잊어달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행복하게 먼저 떠난다'는 그들이다.
'지란특공평화회관'은 그들을 기리기 위한 장소다. 지란은 태평양전쟁 당시 특공기지가 있던 도시다. 그들은 지란을 철저하게 '평화'로 덧칠했다.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조작된 애국심' 가미카제는 이곳에서 '순국열사'로 감사의 대상이다. 가미카제의 '강요된 웃음' 또한 애국심으로 포장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평화가 있다'는 믿음을 강요한다.
세계문화유산 기록으로 남기려고도 했다. 특공대원들의 평화 메시지를 널리 알려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어이없는 시도'는 일본 내부 심사도 통과 못해 물거품이 됐다.
씁쓸하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없다. 전쟁 책임에 대한 비판도, 피해 국민들에 대한 반성도 없다. 그저 '특공'의 '애국'만 있을 뿐이다. 지란특공평화회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가미카제(神風ㆍ신의 바람)를 기리는 수많은 헌등(獻燈)이 일행을 맞는다. 지란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다. 지란은 태평양전쟁 때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도시다.
'특공 비행기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특공대원은 조국 일본과 가족을 사랑했고, 평화를 기원했다.'불끈 쥔 주먹의 건장한 가미카제 용사의 동상. 웃음 짓게 하는 설명이다. 특공대원들은 겉으로는 지원병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강제 징용된 20세 전후 학도병이 대부분이었다. 17세 소년도 포함됐다.
가미카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지자 고안해낸 '엽기적인' 군사작전이었다.
13세기 몽골 제국 쿠빌라이 칸 시대,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일본 원정 실패에서 유래했다. 제주와 진도에서 항거하던 삼별초를 제압한 원나라는 1274년 10월 몽골족과 한족으로 구성된 원나라군 2만5000명과 고려 정예군 8000명, 수군 6700명, 전함 900척을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선다. 하지만 때마침 10월 계절풍이 태풍으로 변하면서 여몽연합군 1만3500명이 몰살당하고 일본 정벌은 실패한다. 일본은 그때부터 10월 계절풍을 '신의 바람(神風)'으로 부르면서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 자부했다.
가미카제는 그들의 표현 그대로 '특별한 공격(Special Attack)'이다. 폭탄을 탑재한 비행기를 탄 꽃 같은 청년들은 그대로 적함에 내리꽂는다. 구명 장치는 없다. 오로지 '돌격 앞으로'만 있을 뿐이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제로센(零戰)'으로 불린 단발 엔진 전투기에 250㎏의 폭탄을 적재하고 출격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란특공평화회관은 가미카제가 출격했던 기지에 세운 기념관이다.
특공평화회관을 세운 이유가 또 한 번 쓴웃음 짓게 한다. '전쟁의 비극이 절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특공대원의 용감함과 영원한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지란특공평화회관을 세운 이유다. 1975년 특공대원들의 자료 전시관(Chiran Resource Center)이, 1987년 평화 박물관(Chiran Peace Museum)으로 '업그레이드'됐다. 가미카제와 평화의 어색한 만남이다.
지란특공평화회관에는 비행장과 특공대원들이 생활했던 막사가 있다. 일제는 1944년 이곳에 일본 육군 최대 가미카제 특공기지를 만들었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조작된 애국심을 강요받았다.
특공평화회관 내부에 들어섰다. 일본 방문객이 가득하다. 17~25세의 나이에 희생된 가미카제의 흑백사진들이 그들을 맞는다. 사진을 보는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숙연한 표정이다. 한국인 방문객으로서 솔직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다. 군복과 군화, 소소한 온갖 유품과 죽음의 비행을 떠나며 남긴 유서, 일장기에 눌러쓴 충성의 다짐 글, 결의가 느껴지는 머리띠 등도 마찬가지다. '나는 죽기위해 오키나와 바다로 간다. 나는 죽은 후에도 나의 조국 일본을 지킬 것이다' '나는 행복하게 떠난다'는 등의 내용이 대다수다.
한 무리의 방문객들에게 흑백 사진을 설명하는 안내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5명의 가미카제가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들려있다. "일본의 한 신문기자가 우연히 지나가다 찍은 사진입니다." 설명이 이어진다. '내일 출격을 앞둔 젊은 가미카제'의 사진이단다. 그는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미소다.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있는 중학생들에게서는 비장감이 느껴지고, 일부 학생은 눈물까지 흘린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것에 감동을 하는 눈치다. 그 할아버지 뒤편에는 출격하는 가미카제 비행기가 있고, 그들을 환송하는 이들의 동상이 서 있다.
안타까웠다. '조작된 애국심'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평화를 위한 애국심'으로 포장된 듯한 느낌, 지울 수 없다.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이 과연 죽음을 앞두고 그렇게 천연스럽게 웃었을지 의문이다. 잘못된 역사교육의 현장인 셈이다. 특공평화회관에는 과거 잘못에 대한 참회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특공대원들의 희생에 대한 증오만을 가르친다. 그들이 왜,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는지, 과거 군국주의의 폐해에 대한 흔적은 없다. 일본 젊은이들을 비극적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지도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도 없다. 그들의 야욕 탓에 짓밟힌 아시아 피해 국민에 대한 반성도 없다. 그저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가미카제 정신만을 강조하고 있다.
반성 없는 그들의 모습, 기막힐 뿐이다.
한 일본 여학생의 방문 후기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14살이라고 소개한 한 그는 '눈물이 난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 감사하다'고 썼다.
그러나 '특공만 있을 뿐 평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평화'를 위해 만든 기념관인가?'. 솔직한 방문 후기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욕,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일제 침략의 흔적들 (2) | 2024.06.03 |
---|---|
지워진 침략의 역사-나가사키 원폭자료관 (1) | 2024.05.31 |
일본의 우경화의 또다른 시작 '쇼인신사'의 '쇼카손주쿠' (0) | 2024.05.24 |
일본 우경화의 현장 '유신 후루사토관' 둘러보니 (0) | 2024.05.22 |
메이지유신의 고향 '가고시마 ' (1) | 202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