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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일본 우경화의 현장 '유신 후루사토관' 둘러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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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후루사토관'에 전시된 일장기를 처음 내건 일본 최초 서양식 범선 모형.

후루사토(ふるさと)'는 '고향'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1994년 개관한 '유신후루사토관'. 말 그대로 '메이지유신의 고향, 사쓰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시관'이다. 가고시마(鹿兒島) 시내 한복판에 있다. 가고시마 중앙역 '젊은 사쓰마의 군상'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다.


'고향'이란 표현에서 사쓰마(薩摩ㆍ현 가고시마)의 자부심이 읽힌다. 사쓰마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역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유신후루사토관은 사쓰마 출신의 메이지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기념관이 있는 바로 동쪽 소공원이 사이고가 태어난 곳이고, 서쪽 소공원이 오쿠보가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역사다.


사이고와 오쿠보는 시기를 달리했을 뿐 '정한론자(征韓論者)'다. 사이고가 메이지유신 직후 조선 정벌을 주장한 반면, 오쿠보는 힘을 키운 후 조선을 정벌하자는 후정한론자였던 차이뿐이다.
그러나 유신후루사토관에서의 사이고와 오쿠보는 정한론자가 아닌 '견한론자(遣韓論者)'다. '침략'이 아니라 '평화 사절단의 조선 파견'이라는 것이다.


사이고와 오쿠보는 또 일본 근대화를 이끈 '영웅 중에 영웅'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유신후루사토관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이고의 좌우명이다. 무사계급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그가 공경하는 하늘은 무엇일까. 발걸음이 무겁다.

 

'유신후루사토관(維新ふるさと館)' 입구에서부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일행을 맞는다. 그들의 생전 모습으로 분장한 이들이다. 일본 전통의상을 한 사이고는 강아지 인형을 옆에 끼고, 오쿠보는 중절모자를 쓴 신사의 모습이다. 그들의 자부심은 '사쓰마 번의 독특한 교육방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항중교육 (鄕中敎育)'이다. 스승에 의한 교육이 아니라 선배 무사가 후배 무사를 가르치는 사쓰마의 독특한 교육방식이다.


향중(鄕中)은 연령에 따라 이재(二才ㆍ청년)조와 치아조(稚兒組)의 두 개로 나눠졌는데, 치아조에는 또 장(長)치아조(11~13세)와 소(小)치아조(7~10세)가 있다. 장치아조가 소치아조를, 청년조가 장치아조 지도를 맡아 교육하는 식이다. 치아는 매일 기뺏기 등 경기와 전쟁놀이를 통해 심신을 단련했다. 청년들은 오전 중에 한학 등을 배우고 오후에는 무예를 익히거나 장치아들의 지도를 맡았다. 밤에는 군사학 관련 책을 읽고 스스로 담력을 시험하는 등의 교육을 했다. 사쓰마 번 특유의 사무라이 교육이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쓰마의 향중교육이 만들어 낸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이 유신후루사토관에 사쓰마만의 향중교육을 소개하고 있는 속내다. 사이고와 오쿠보를 영웅화하기 위한 것.
사이고와 오쿠보의 영웅화에서 그들의 자부심은 절정이다. 그들을 소개하는 안내판에 '거성(巨星)' '兩大人物(양대인물)''Two Great Man' 이라 적혔다.


'정한론(征韓論)자'였던 사이고와 오쿠보는 이곳에서는 '견한론(遣韓論)자'다. 정복이 아니라 평화 교섭단 파견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교사 출신이라고 소개한 유신후루사토관 관계자는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아니었다"고 했다. 대신 "그는 조선에 정식으로 사절단으로 방문해 근대화와 관련된 것을 전파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오쿠보 역시 후 견한론자다. 그는 "오쿠보는 사이고와 달리 내치를 통해 강해진 다음에 조선에 사절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의견차이만 있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의 사이고와 오쿠보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은 유신후루사토관 곳곳에 가득하다. 사이고와 오쿠보의 동상은 물론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들의 초상화다.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위정청명(爲政淸明)'의 글귀도 곳곳이다. '경천애인'은 사이고의 좌우명이었고, '위정청명'은 오쿠보가 남긴 이야기다.


두 '거성'을 비교 평가해 놓은 홍보물도 눈에 띈다.


좌우명에 태어난 곳은 물론 혈액형, 신장과 몸무게까지 비교했다. 심지어 그들이 결혼한 부인의 이름까지 나열돼 있다. 사이고는 3명의 여성이름이, 오쿠보는 2명이 기록돼 있다.


또 하나 거슬리는 모형이 눈에 띈다.


지금의 일장기를 꽂은 범선 모형이다. 일본 최초의 서양식 범선인 승평환(昇平丸)이다. 사쓰마의 28대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가 만든 범선이다. 그 옆에서는 원조 '기미가요((君が代)'가 흘러나온다.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일본 국가(國歌)의 시작이다는 설명이다. 범선이 일본의 것임을 알리기 위해 불렸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유신후루사토관에 승평환을 전시한 것 역시 사쓰마에 대한 자부심인 셈이다. 세계적 시야를 가지고, 서양문명의 실용화와 아울러 부국강병ㆍ식산흥업(殖産興業)ㆍ인재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 일본은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파종(播種)을 하고, 사이고와 오쿠보에 의해 개화(開花)되고, 그 후배들에 의해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그들이다. 그 원동력은 역시 교육에 의한 인재육성이다.
유신후루사토관 지하에서도 영웅화된 사이고와 오쿠보를 만날 수 있다. '유신 체감 홀'이다. 막부시대 말기의 가고시마 시가지 복원모형과 소리와 빛, 영상, 로봇 등의 하이테크 기술을 이용한 다채로운 연출을 통해 메이지유신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역시 사이고와 오쿠보 등의 모형이 등장하는 등 그들의 영웅화는 끝나지 않았다. 매년 15만명 가량이 이곳을 찾는다


안내를 맡았던 해설사는 "메이지유신은 봉건사회의 일본이 근대화로 넘어가는 계기"였다며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이 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는 정책을 폈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으로 서양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낸 것이고 그 중심에 사쓰마(가고시마)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형적인 일본인들이 강조하고 싶은 '메이지유신'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질적인 역사관이다. 이들의 메이지유신은 그들만의 유신이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유럽과 미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결국 조선을 철저하게 유린했다는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유신후루사토관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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