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정벌해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유수록(幽囚錄)이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시작이다. 그의 '꿈'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제자'들에 의해 구현됐다. 쇼카손주쿠는 쇼인이 2년여 동안 제자를 가르쳤던 시골의 작은 학숙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도쿠가와막부를 쓰러뜨리고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가 되어 강병 정책을 추진했다. 무사 계급과 다이묘(大名)까지 제거한 다음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는 국민개병의 근대 군대를 만들었고, 그 군대로 침략을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앞장섰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탄생한 일본 제국주의의 초대 총리다. 그는 조선 침략을 주도했고,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을 기획했다. 쇼인의 또 다른 제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힘을 보탰다. 둘은 1885~95년 일제 내각 총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완성해갔다.
1910년 8월29일.
3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자 요시다 쇼인의 '꿈'이 시작된 날, 우리에게는 더 없는 치욕의 날이다. 조선을 집어삼킨 그들은 만주를 침범해 '만주국'을 세웠고, 군국주의의 길로 더 나아가 아시아에 큰 고통을 줬다. 그 고통의 시작이 요시다 쇼인이었고, 그의 제자들이 중심에 있다 조선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ㆍ1841~1909). 우리 역사는 그를 잊을 수 없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고 숨졌다. 그는 조선 침략을 주도했고,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의 기획자였다. 일본 제국주의 초대 총리도 이토다.
우리에게는 개운치 않은 인물. 그의 흔적을 찾아 떠났다.
야마구치(山口) 현 하기시(萩市).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주신으로 한 신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쇼인신사(松陰神社)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이토의 실물 크기의 '도자기 동상'이 생가 입구에 서 있다. 고택 앞에 세워진 이토의 약년보 중 '하얼빈 암살'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실 이토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이토는 1841년 야마구치(山口) 현 히카리(光)시에서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야시 리스케(林利助), 그의 본명이다. 13살 때 그는 하급 무사였던 이토(伊藤)가의 양자가 되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쿠(송하촌숙ㆍ松下村塾)에서 도보로 10분이 채 되지 않는 곳이다.
쇼인과 쇼카손주쿠는 이토에게는 '기회'였다.
쇼인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제자를 받았다. 당시에는 사무라이 우선 계급사회였다.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그러나 문화생들에게는 신분 상승 의지로 작동했다. 결과적으로 이토가 최대 수혜자가 됐다. 쇼카손주쿠 강의실로 쓰였던 방에는 지금도 13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학숙을 세웠던 요시다 쇼인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다. 이토의 초상도 한편에 걸려있다.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토는 쇼카손주쿠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등 훗날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는 이들과 교류를 쌓았다. 그들과 관계가 썩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상급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다카스기는 신분 의식이 강해 이토를 동지보다는 하인 취급을 했다. 그렇지만 다카스기는 조슈에서 잡병(雜兵)으로 이뤄진 기병대(奇兵隊)를 창설, 이토에게 30명의 부하를 거느릴 수 있게 했고 '주선가(周旋家)'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이토는 학당 동문이자 유신 3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의 시중꾼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쇼인이 그랬듯 이토는 막부시대 말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앞장섰다. 낮은 신분의 하급 무사였던 그는 존왕양이파의 반대 인물을 제거하는 암살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이토는 해군학을 배우기 위해 영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영국ㆍ프랑스ㆍ미국 등의 열강과 조슈번 사이에 시모노세키전쟁이 일어나자 평화교섭을 위해 통역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그는 사쓰마 번 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가깝게 지내면서 승승장구했다. '히로부미'로 개명한 것도 이때다. 그 전까지의 이름은 이토 순스케伊藤俊輔)였다.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메이지 정부가 대분열을 맞았을 때 이토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을 오쿠보 등과 함께 반대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급진적 정한론자였다. 반면 오쿠보는 내치 후 조선정벌을 주장했던 후 정한론자였다.
사이고 등 급진적 정한론자들이 쫓겨난 후 이토는 참의겸 공무경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자 그를 계승해 내무성의 내무경이 됐다. '유신 3걸'이 쓰러지면서 그 공백을 이토가 차지한 꼴이다. 기도는 병사(病死)로 퇴장했다.
이토는 1885년 내각제도가 창설되자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등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공포를 주도한 인물도 이토였다. 그는 초대 총리를 비롯해 1892~1896년과 1898년, 1900~1901년에도 각각 5대, 7대, 10대 내각 총리대신을 지냈다. 조선침략에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11월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한 뒤 고종과 조정 대신들을 강압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장악했다. 1906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 한국 침략의 기초공작을 수행했다. 1907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도록 했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돼 만주시찰을 겸해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을 방문했다가,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 농민계급 출신으로 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을 각각 4차례씩 지내고 공작 작위까지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한 때 일본 천 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침략과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이 바로 이토다. 부정할 수 없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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