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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메이지유신의 고향 '가고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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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일본 근대화 역사에서 사쓰마(薩摩ㆍ지금의 가고시마)는 빼놓을 수 없다.

"현대 일본을 알려면 메이지 유신을 이해해야 하고, 메이지 유신을 알기 위해서는 가고시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역사학자 주강현의 이야기다. 가고시마(鹿兒島)는 우리나라로 치면 해남 땅끝 정도다. 당시 정치 중심이었던 에도(도쿄)에서 수천㎞ 떨어진 변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중국과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가깝다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일찍이 무역이 발달했고, 일본 근대화의 발상지가 됐다. 앙숙이었던 조슈 번(長州藩ㆍ 지금의 야마구치 현)과 손을 잡고 메이지 유신도 성공하게 했다. 그 결과 700년 동안 칼을 차고 활보했던 사무라이(막부)정권이 막을 내렸다.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었고, 군국주의 서막을 열었다.


우리와는 불편한 관계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경관과 질 좋은 온천이 즐비해 한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가고시마다. 명승지 안내판에 한글이 빠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1870년대 일본 정계에서 대두한 조선 공략론인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의 발상지이고, 메이지 유신과 일본 근대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인물을 다수 배출한 곳이다. 뿐만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발진기지도 이곳에 있다. 가고시마의 존재가 마음을 짓누르는 연유다.


가고시마 기행의 첫 출발지, 가고시마 중앙역으로 향했다. 역 광장에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이 서 있다. 1865년 일본 최초로 영국에 유학을 갔던 19명의 사쓰마 젊은이들을 기린 동상이다. 당시는 에도 막부 시절로 해외 도항을 금지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쓰마 번주는 이름을 바꾸면서 밀항시키듯 이들을 유학 보냈다.
1863년 영국과의 일전이었던 '사쓰에이(薩英) 전쟁' 영향이었다. 막강한 영국의 전투력을 확인한 사쓰마 번이 영국을 배워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과 의지로 젊은이를 유학 보낸 것이다. 이들은 귀국 후 일본 근대화에 앞장서는 인재가 됐다. 도쿄대학 초대 총장 하타게야마 요시나리, 초대 도쿄박물관장인 마치다 히사나리(町田久成) 등이 유학생이었다. '젊은 사쓰마의 군상'을 세운 배경이다. 일찍 유학을 다녀온 사쓰마의 젊은이들이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 바로 '젊은 사쓰마의 군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행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귀국 후 그들은 1873년 정한(征韓) 논쟁을 촉발시켰고, 내전 등을 통해 정한론은 더 강화해 결국 우리에게 '일본 강점기'라는 치명적 상처를 안겼기 때문이다.


가고시마하면 메이지 유신도 빼놓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 3걸' 중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가고시마 출신이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 그의 일생을 모르면 가고시마 답사를 할 수 없을 정도다. 그가 할복한 동굴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고 그를 캐릭터화한 인형ㆍ과자ㆍ달력은 물론 학용품, 생활용품까지 팔린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한 동굴은 가고시마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로야마(城山)에 있다. 시로야마는 서울로 치면 남산이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불편하다. 그는 조선침략의 명분을 찾지 못하던 당시, 제 죽음을 통해서라도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한론의 선두주자였다. 시로야마에서 내려와 이제는 '유신후루사토관(維新ふるさと館ㆍ유신의 고향관)'이다. 이곳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사쓰마 번의 제11대 번주이자 시마즈 가문의 제28대 당주로 있었던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의 인물에 대한 설명과 유신 전후의 사쓰마 상황이 소개돼 있다. 특히 '유신후루사토관'은 정한파의 '위업'을 견한론(遣韓論)이란 이름으로 희석시켜 가며 후대에 전하고 있다. 불편한 '역사 왜곡'인 셈이다.


지란(知覽)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무겁다. 가고시마 시내로부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한적한 시골 마을 지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기지였다.


지란특공대원들이 외출 나와 들렀다는 '도미야 여관'. 온통 특공대원의 기념물이 가득하다. 여관의 한켠에 빛바랜 한국인 사진 한 장이 걸려있다. 탁경현(卓庚鉉)이다. "그가 출격 마지막 밤 이곳에 들러 아리랑을 불렀다"는 여관 주인의 울먹이는 설명. 한국인 방문객을 향한 '연기', 쓴웃음이 나온다.


'지란특공평화회관'도 안타깝다. 가미카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간. 특공대로 전사한 육군항공대원의 사진이 전시관을 가득 채우고, 빛바랜 일장기가 곳곳에서 방문객을 맞는다. 그들의 남긴 유서도 방문객을 불편해한다. 강제로 동원한 젊은 청춘의 죽음이 이곳에서는 '평화를 위한 애국'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이곳 특공평화회관에서는 '평화의 사도'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장소였던 가고시마. '왜 이곳이었을까.' 떠나지 않는 의문이고, 곱씹어지는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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