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遠東)'.
지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1937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기 전 그들이 살았던 곳이 바로 '원동'이다. 원동은 그들의 고향이다. '바다가 뾰족하고 짠 혓바닥을/ 내민 듯한 모습인/ 원동 연해주 땅, 뽀시예트에/ 고려인 마을이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가 사셨던/ 농가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겨우 두 세대만/ 이 초원보다 더 가까운 곳이/ 세상에 없는 듯/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가 그리워하는 고향, '원동'이다.
1937년 10월 그들이 짐짝처럼 처음 내려졌던 우슈토베 역 인근에도 '원동'이 있다.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이 만든 '원동마을'이다. 1938년이다. 허허벌판 황무지에서 언덕을 바람막이 삼아 경사면 아래에 숟가락 하나로 토굴을 파고 부둥켜안은 채 체온을 나누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냈던 다음 해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긴 겨울을 살아남아 봄이 되자 황무지를 일구었다. 농기구도 제대로 없어 거의 맨손으로 물길을 내고 논밭을 만들었다. 살아갈 집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마을이 원동마을이다.
8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원동마을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지난해 찾은 원동마을, 우리의 시골 마을 풍경 그대로다. 널찍한 마당에 우물이 있고, 김장독을 흙마당에 파묻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마당 한쪽에 있는 '누렁이 집'도 우리네 시골집 풍경 그대로다. 손님에게 아낌없이 음식을 내놓는 따뜻한 마음도 잊을 수 없다. 그 마을 한 쪽에 자리한 제르진스키 학교. 조그만 시골학교지만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는 뜻깊은 곳이다. 학교의 역사는 그들의 강제이주와 역사가 같다. 1938년 마을과 함께 세운 학교가 제르진스키 학교다. 현지 고려인 중 최고위직에 올라간 유리김(전 헌법재판소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많은 저명인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역대 교장 대다수가 고려인이었다. 이름난 작가인 아나톨리김의 아버지도 이곳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고려사람의 성을 가진 학생이면 누구나 1학년부터 최고학년인 11학년까지 모국어인 한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배웠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교실도 있었다. '한국어'라는 제목의 게시판에는 곤룡포를 입은 세종대왕, 윤동주 시인, 그리고 지역과 관련이 있는 고려사람으로, 구 소련 시절 또는 소련 해체 후에 문인으로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소개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바뀐 모습이다.
'젊은' 고려인들이 떠나면서다. 한때는 제르진스키 학교의 학생 80%가 고려인이었다. 지금은 전체 학생 230여명 중 40명 정도가 고려인일 뿐이다. 정규 과목이었던 한국어 수업도 이제는 없다. 다만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우리로 치면 방과후수업이다. 고려인 3세인 김에브게니아는 이곳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옛날에는 고려인이 한글 말을 많이 배웠다. 공부해라, 배우라고 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학생들만 고려말을 배운다. 20명 정도를 가르치고 있다. 오후에 시간이 있을 때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교실은 사라졌다. '한국어'라는 제목의 게시판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옛날에는 (한국어 수업 교실이)다 있었다. 이제는 없다. 교실이 모자라 한국어 교실 안 된다. 고려인이 많이 줄었다. 시골이어서 일도 없고 젊은 사람들은 큰 도시로 떠났다. 할아버지 할머니만 살고 있고, 많이 돌아가셔서 이제는 별로 없다. 옛날에는 나라에서 고려말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고려인이 많은 곳에서는 자기 모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은 프로그램이 없다. 한국어 수업이 없다." 김에브게니아 교사의 아쉬움이 담긴 설명이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 한곳으로 일행을 이끈다. 자물쇠가 채워진 학교 내 외진 교실이다. 조그마한 공간 한쪽에 우리말로 된 책이 있고, 우리말을 배운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공예품이 놓여있다. 교실 벽면에는 널뛰기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교실에 채워진 자물쇠가 말하듯 지금은 유일하게 학교에 남겨진 '잊혀가는 흔적'일 뿐이었다. '알마티에서 고려인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려인의 중심인 고려인협회에서도 고려극장에서도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이 가능하다. 현재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손으로 헤아려야 한다. 거기에 한국어로 문학을 창작할 수 있는 고려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1996년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최석 시인의 말처럼, 고려인이 처음 만들었던 원동마을에도 이젠 한글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쉬운 발걸음이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미카제 기념관 '지란특공평화회관' (1) | 2024.05.31 |
---|---|
일본의 우경화의 또다른 시작 '쇼인신사'의 '쇼카손주쿠' (0) | 2024.05.24 |
일본 우경화의 현장 '유신 후루사토관' 둘러보니 (0) | 2024.05.22 |
메이지유신의 고향 '가고시마 ' (1) | 2024.05.21 |
일본 우경화의 시작 '쇼인신사'를 가다 (2) | 202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