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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 좋은 이야기

디아스포라 고려인-고나의 시작 '우슈토베'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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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정유년(丁酉年)이 시작됐다. 올해는 카레이스키 강제이주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지난 1937년 소련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스탈린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전남일보 특별취재팀은 고려인의 흔적을 찾기 위한 첫 일정을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했다. 사진은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후 처음으로 도착해 내린 우슈토베 역이다.

눈이 내린다. 길은 보이지 않고, 하늘과 땅이 맞닿은 광야가 끝없다. 가끔씩 등장하는 도로 이정표만이 향하는 목적지를 알려줄 뿐이다. 그마저도 낯선 나라의 언어다. 내리는 눈이 막막함과 힘겨움을 더한다. 80년 전 연해주에서 이유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갔던 고려인들의 마음도 이러했을까.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북동쪽으로 330㎞가량 떨어진 우슈토베를 찾아가는 길, 발걸음이 무겁다.


기억은 어느덧 80년 전 '그날'이다. 1937년 8월21일. 비극의 시작이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인 이주를 지시하는 비밀명령서에 서명하면서다. 당시 극동의 소련 영내에 거주하는 한인 17만여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쫓아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 정보원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려인이 일본을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그해 9월9일 강제 이주가 시작됐다. 가장 슬픈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기차에 올라탔다. 추수한 농작물은 제값도 받지 못하고,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챙기지 못한 채였다. 어떤 이는 산속에 숨었다가 붙잡혀 열차에 오르기도 했다. 기차는 마소를 운반하는 화물차량이었다. 그마저도 너무 많은 사람이 타 셀 수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끌려오는 바람에 식량도 부족했다. 기차가 잠시 서는 틈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물을 긷거나 요깃거리를 구해야 했다. 마실 물이 없어 빗물과 도랑물을 먹었고, 그릇에다 대ㆍ소변을 해결했다. 그렇게 한달이 넘는 지옥같은 시간을 열차에서 보냈다. 추위에 죽고, 굶어서 죽었다. 숱한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이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열차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지순옥(94) 할머니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죽은 사람은 화물칸 한쪽에 모아 놨다가 기차가 강을 지날 때 물에 던졌다. 심지어 홍역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옮을까 봐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목에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지기도 했다."


기억은 생생한데 이제는 말라버린 눈물이다. 지순옥 할머니의 눈은 어느덧 불거진다.

'일구 삼칠년/ 돼지처럼 끌려 차량에 갇힌 채/ 밤낮없이 달리던 기차바퀴/ 어디로 얼마나 가는가. 우리는/ 불안함은 차량 틈 사이로 끝없이 내달린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하염없이 달리던 기차는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멈춰섰다. 우슈토베 역이었다. 야속한 세월을 품은 채 역은 지금도 그대로다. 그들을 싣고 달렸던 화물열차는 지금도 달리고 있다.

 

짐짝처럼 내려진 우슈토베,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부려진 그들을 맞이한 것은 허허벌판의 바람과 황무지였다. 살아야 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수레에 실려, 걷고걸어 그들은 바스토베로 행했다. 우슈토베 역 인근의 조그만 언덕 산이다. 바스토베는 카자흐어로 '머리언덕', 말 그대로 우슈토베 외진 곳에 사람 머리를 엎어놓은 모양의 언덕이다. 허허벌판의 황무지에서 그나마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다시 살아야 했다.

 

그 언덕을 바람막이 삼아 경사면 아래에 숟가락 하나로 토굴을 파고 부둥켜안은 채 체온을 나누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냈다. 생존에 대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또 죽어갔다. 땅이 얼어 제대로 된 무덤도 만들 수 없었다. 1996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최석 시인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나가면 토굴 밖 눈 속으로 시신을 밀어냈다가 눈이 녹는 봄에 땅에 묻었다"며 "1937년과 38년 이곳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유하는 곳이 됐다"고 설명했다. 낯선 땅에서 긴 겨울을 살아남은 그들은 이듬해 봄이 되자 황무지를 일구었다. 농기구도 제대로 없어 거의 맨손으로 물길을 내고 논밭을 만들었다. 살아갈 집도 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었지만 마침내 끈기와 근면으로 집단농장을 만들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최초로 정착해 땅굴을 파고 살았던 바스토베 언덕 아래에는 이제 회색과 검은색 지표석의 기념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기념비에 적힌 문구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세운 초라한 기념비다. 

 

그들이 살아냈던 바스토베, 이제는 그들이 누워있다. 자신들이 첫해 겨울을 보낸 그곳, 바스토베를 자신들의 묘지로 삼았다. '출생 1905 사망 1951 조수만 묘', '1879~1951 박이준'. 그들이 세운 허름한 비석에는 못다 푼 한을 안고 죽어 간 선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무덤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진 녹슨 묘표도 눈에 띈다. 이역만리에서 느끼는 세월의 덧없음이다. 그곳의 흔적도 이제 희미해져 간다. 기념비 바로 뒤 공동묘지에는 눈만 쌓여있다.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땅굴 막 자취도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한 채 하나둘 사라진다.


'양만리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이름 없이 피었다 쓰러져간 꽃 넋들/ 모질게 다시 일어난 이 언덕에/ 질긴 목숨 뿌리내렸건만/ 돌보는 이 하나 없이 일흔 해를/ 눌리고 찟기고 밟히고 묻혀/ 이리 풀 한 포기 없이 붉은가/ 하늘 아래 흰옷 입고 살아온 것이/ 그 무슨 해를 가리는 죄였던가'.

 

김병학 시인이 표현한 '바스토베 언덕'이다. 바스토베 언덕을 오르는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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